문학/에세이

단편소설 - 기억의 끝

루벤초이 2021. 4. 7. 22:41

"선생님, 기억은 무한한가요?"

최면에서 깨어난 남자는 의사에게 물었다.

"글쎄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뇌 어딘가에 기억이 써지는데 아직 연구가 필요한 분야죠. 왜 그런 질문을......?"

"최면 중에 무언가를 보았어요."

"아마도 잠재된 기억일 거에요. 최면으로 세 살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니까요."

"그렇겠죠. 맞아요, 5살 때 우리집, 아빠, 엄마 모두 생생했어요. 좁지만 풍성한 꽃들로 가득한 마당에서 강아지와 뛰어 놀았죠. 아, 그 강아지 이름이 해피였어요. 등 뒤에서 강아지를 향해 '해피, 이리 온!'하고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죠."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이군요."

"네,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정말로요! 그 날, 우리는 마당에서 바베큐를 했어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오, 그렇게나 좁은 마당에 나무며 꽃들이며 연못까지, 없는 게 없었네요! 나는 아빠가 고기를 굽는 동안, 연못 안에 금붕어들에게 먹이를 줬어요. 그 즈음에 하늘이 흐려지면서 선생님 목소리가 들렸죠. '자, 이제 셋을 세면 당신은 깨어납니다. 하나, 둘,......' 그 짧은 순간 나는 무언가를 보았어요."

"흥미롭네요. 뭘 보셨다는 거죠?"

의사의 애써 관심있는 척 대꾸했지만, 퉁명스럽고 냉랭한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누군가 무언가를 적는 모습을요."

"네......?"

"그래요, 어떤 손이 뾰족한 연필처럼 생긴 것을 들고 내 머리 속에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모습을요. 그때 난 내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죠."

"잘 이해가 안 가네요......."

"그러니까, 선생님의 카운트다운에 유체이탈처럼 세 살 아이 몸 속에서 빠져나오는데, 어떤 존재가 아이의 머릿속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고요!"

"네, 최면 상태에서 빠져나오면서 일시적으로 환각이나 환청이 느껴진 것 같네요. 뭐, 곧 괜찮아지실 거에요. 5분만 편안히 눈을 감고 있으세요. 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지는 않죠? 네, 그럼 괜찮아요. 간호사! 환자분에게 담요랑 따뜻한 물 한 잔 갖다 드리세요. 그럼, 저는 다른 환자가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요."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진정시키듯 내팽개치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남자는 의사의 관심 없는 표정에 더 얘기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사실 남자가 본 장면은 실제로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인데, 인간의 뒤통수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눈, 코, 입, 귀, 몸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끊임없이 분석(parsing)하고 부호화(encoding)해서 뇌세포에 기록하는 프로세스이다. 눈, 코, 입, 귀, 몸으로부터 들어오는 오감(시각, 후각, 미각, 청각, 촉각) 정보를 숫자로 부호화하는데 각각의 정보가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서 복소수를 사용해 부호화한다. 이렇게 부호화된 다섯 개의 거대 복소수와 보이지 않는 손, 즉 무한원점에 의해 리만 구(Riemann sphere)가 형성됨으로서 실시간으로 오감을 기록할만큼 효과적인 기억 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저장매체인데, 이 기억의 영역은 영원히 쪼갤 수 있는 선분처럼 물리적으로는 유한하지만 무한히 기록할 수 있는 신비로운 속성을 갖고 있어서 써도 써도 무한히 늘어나고 언제든 무한 저편에서 유한한 형태의 기억을 복원해낼 수 있다. 가령 수학자 힐베르트의 무한 호텔에서는 무한한 객실이 만실일 때 새로운 손님이 오면, 모든 기존 손님들에 대해 k호실 손님을 k+1호실로 옮기고 마지막으로 남은 1번 방에 새로운 손님을 받는다. 우리의 직관은 자연수의 무한 집합보다 정수의 무한 집합 수가 더 많을 거라고 울부짖지만 무한은 거침없이 두 집합의 수가 같다고 말한다(자연수/정수 두 무한 집합의 크기는 알레프0으로 알려져있다). 기억의 영역은 무한 복소수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영역의 크기는 알레프1으로 알려져 있다(실수 체계가 알레프0이고 알레프1 = 2^알레프0의 관계가 있다:TMI).

우리의 모든 순간은 무한하게 저장된 것이어서 그 어떤 것도 잊히지 않는데, 무한하다고 해서 복제나 백업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서 대체로 하나의 기억이 지워지면 영원히 복구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인간의 기억은 고유한 것이므로 한 인간이 죽는 것은 그래서 한 세계가 사라진다고 멋지게 표현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무한 기억 프로세스라고 일컫는다.

한편, 그 날 이후 남자는 수년간의 치열한 사유를 통해 마침내 무한 기억 프로세스를 스스로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비상한 두뇌 뿐만 아니라 사업가 마인드까지 가졌던 그는 단순히 철학적 성취감에 머무르지 않고 그 원리를 활용할 방안을 찾았다.

'제아무리 무한한 기억이라고 해도 무한한 기억의 총합은 결국 유한한 물리적 공간, 즉 뇌 어딘가에 담겨져 있다. 그 영역을 찾아내 다른 사람 뇌로 이식한다면 기억을 이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때 유행했던 라이프 로깅도 불편한 정보 수집 방법과 그럼에도 온전하게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버림받지 않았나? 하지만 모든 것을 온전히, 그것도 간단한 이식 수술로 기억할 수 있다면...... 그래, 죽음을 앞둔 가족의 기억을 온전히 이관하는 상품을 만들어 팔면 되겠어!'

위대한 아이디어가 어떤 비극을 초래해왔는지 역사는 말한다. 그렇다고 항상 비극만 있어온 것도 아니고 변증법처럼 선에서 악으로, 악에서 선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에 일상이 되어버리는 일반적인 프로세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적어도 글을 쓰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지배적이다. 초기에는 고인의 기억을 이관받는 컨셉으로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기도 했지만, 곧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기억의 불법 거래, 위조, 비윤리적 불법 시술 가령 반려견 등 이종 간 기억 이관에 따른 기이한 부작용 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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