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줄거리 및 결말 등 강력한 스포가 포함돼 있습니다. *****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 중 망작이라는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을 나는 참 재미있게 봤다.
어느날 문득 찾아온 겨울만큼이나 갑작스레 찾아온 허리 디스크 덕분에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려다 뒤늦게 빠져든 닌텐도 스위치 <젤다의 전설>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게드전기> 분위기가 좋았고 바람에 흩날리는 주인공들의 머리칼은 정처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아렌: 사람은 언젠가 죽어버리는데 목숨을 소중히 해봤자 뭐 해... 끝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살아가야 하나...
테루: 틀렸어! 죽는다는 걸 알기에 목숨이 소중한 거야! 네가 두려워하는 건 죽는 일이 아냐. 살아가는 걸 두려워 하는 거지!
(출처: 넷플릭스 자막)
좀 더 편해지기 위해, 많은 것들을 내려놓기 위해 memento mori, 덧없는 것들을 생각하던 내 마음 깊이 와닿는 말이었다. 내친 김에 좀 더 허무해지고 싶어서 전쟁에 관한 소설을 읽기로 했다. 그렇게 떠오른 것이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전자책 <밀리의 서재>로 읽다 보니, 첫 페이지에 표지를 실었는지 보통 'two thumbs up' 같은 좋은 평들을 소개하는 자리에 뜬금없이 결말이 떡하니 스포돼 있던 바람에 책을 덮을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유명한 작품이니 감사히 읽어보기로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독일, 150명분의 식사를 준비했지만 돌아온 이는 절반도 안되는 장면으로 시작한 소설 속에는, 학교 선생님의 설득에 넘어가 친구들과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 파울 보이머와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부상을 입고 병상에 누운 친구 켐머리히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어차피 죽을) 친구의 장화를 탐내는 모습들로 죽음이 일상화된 전쟁 속 모습이 그려진다. 전장에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죽음들과 또 그 속에서 거위를 잡아먹는 등 우스우면서도 사소한 일상, 참호 속에서 미쳐가는 사람들과 그와중에 음식으로 여자를 꼬시는 젊은이들의 모습 속에서 잔인하고 비극적이면서도 그것이 그들의 삶이기 때문에 또한 평범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데, 오히려 파울 보이머가 가장 우울하게 보일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휴가를 나와 병든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보이지 않는 미래와, 현실 조차도 전장 안에 속박된 파울에겐 오히려 자신이 살던 고향이 더 어색한 것이다. 전시가 아니었음에도 26개월의 긴 군생활 동안 나 역시 휴가를 나올 때마다 내가 '가는 곳'과 '돌아갈 곳'에 대한 혼돈이 있었는데, 단순한 소속, 신분, 습관을 넘어 뭐랄까 너무나도 생소하고 이질적인 새로운 상황과 장소에 익숙해질 수도, 그렇다고 원래 살던 곳에 머물 수도 없는 분열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의 생각은 여기서 막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나를 우세한 힘으로 끌고 가고 기다리는 것은 이런 감정들이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욕망이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며, 피인 동시에 살아남은 것에 대한 희열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학교에서 그가 그토록 수학을 잘했다는 사실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유혈 사태, 수십만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이런 감옥을 수천 년의 문화로도 막지 못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거짓되고 무의미한 것인가. 이러한 전쟁의 참상을 바로 야전 병원이 보여 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파멸을 맞게 된다.
결국 현실과 미래, 세대를 잃은 파울은 전쟁과 함께 사라지지만, 그의 죽음은 무덤덤하게 서부 전선 이상 없다고 무시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한 세대의 오류와 비극에 휘말려 그의, 그들의 인생은 잔혹한 전장의 기억으로만 뒤덮이지만, 여전히 소설 곳곳에 녹아있는 추억과도 같은 일화들은 '그래도 우리는 살았다'고 항변하듯, 아무리 비참한 삶이라도 삶에 대한 의지로 살아내는 그 시간은 귀하고 값진 것임을 외치는 듯 하다.
그리고 그 전장 어딘가에서, 아직 생사를 알 수 없는 우리의 한스, <마의 산>의 주인공 또한 여전히 '보리수'를 흥얼거리고 있겠지.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독일군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연합군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들었다. 나름대로 책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이토록 익숙한 제목의 소설을 처음 읽는다는 부끄럼도 잠시,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같은 전쟁에 대한 부조리함이라든지 우울하고 회의적인 정서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무기여 잘 있거라>는 반전 문학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이고 무감각한 주인공과 심지어 에피소드조차 주인공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다. 주인공 프레데릭 헨리는 미국인이면서 이탈리아 군에서 구급차 호송을 다루는 중위로 나오는데, 그가 왜 미국인이면서 이탈리아 입대했는지 배경도 언급되지 않지만, 도무지 그의 말이나 행동에서 어떠한 사명감이나 평화에 대한 의지 따위를 찾아볼 수도 없다. (실제로 미국인 헤밍웨이는 적십자를 통해 이탈리아 군으로 참전했다고 하는데, 그 자신 또한 그렇게 냉소적인 마인드로 참전했던 것일까?)
헨리는 전쟁의 긴박함과 진지함보다는 언제나 한 걸음 뒤에 있는 듯 무관심해보이며, 시종일관 평온한 공간에서 매 순간 술을 끼고 산다. (전체 소설에서 도대체 어떤 술을 몇 잔이나 마시는지 세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시종일관 진지하지 않은 자세로 전쟁터에 있다가 뜬금없이 폭탄 파편에 맞아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는 (이제 전쟁에 대한 각성이 시작되나 했지만) 병원에서 일하는 캐서린과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여 임신까지 시키는데, 그렇게 한참을 병원에서 연애와 요양을 병행하다가 부대 복귀 후 이런저런 상황에 헌병에게 잡혀 (부대를 이탈한 장교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가더니, 캐서린을 만나 호텔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지배인의 도움으로 잡혀가기 일보 직전에 캐서린을 데리고 스위스로 망명해서는 잘 사는 듯 하다가 출산과 함께 캐서린과 아기를 모두 잃는다는 스토리다.
내가 그 위대한 헤밍웨이의 소설을 이처럼 당혹스럽게 이해하게 된 이유는 바로 제목 때문이다.
번역은 반역
A Farewell To Arms에서 Arm은 '무기'라는 뜻도 있지만, 사람의 '팔'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즉 캐서린의 죽음으로 헨리가 안길 캐서린의 품, 양 팔과 작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평론에서 이 소설은 전후 상실의 시대를 살아간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주제의식, '전쟁'과 '사랑'에 대한 상실과 허무를 다룬다고 하는데, 나는 단지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유명한 제목만 보고 당연히 전쟁에 관한 소설일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물론 실망과 당혹감 속에서도 소설을 계속 읽어내려 가는 동안, 점차 실존주의적 허무감을 공감했고 계속 술로 찌들어가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 내던져진 세상과 운명의 가혹함을 냉소적이게 바라보는 헨리의 시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용 자체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남겼던 것 같다. 파울 보이머가 <마의 산>의 한스로 이어졌다면, 헨리는 카뮈의 <이방인>으로 이어지는 듯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인터넷을 찾아 보면, <무기여 잘 있거라> 제목에 대한 비판이나 비평은 찾아볼 수 없는데, 나만 예민하게 구는 것인지, 아니면 유명한 제목 만큼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결코 신성한 것을 눈으로 본 일이 없었고, 영광스럽다는 것에서 영광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희생물로 바친 가축은 땅속에 파묻는다는 것만 다를 뿐 시카고의 가축 수용소에 수용된 가축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귀로 들어 줄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들이 너무 많다. 그리하여 땅의 이름만이 위엄을 지닌다.
전쟁을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그들이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요? -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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