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북톡

[리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ep.4 - 질베르트

루벤초이 2022. 12. 31. 22:34

스노비즘을 다룬 르그랑댕 이야기 후 마르셀이 가족들과 산책에 나서는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작품 1편의 부제목인 '스완네 집 쪽으로' 난 길과  작품 3편의 부제목인 '게르망트 쪽'으로 난 두 개의 갈림길이 소개된다.

 

콩브레 주변에서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 개 있었는데, 이 두 '길'은 아주 반대 방향에 있어서 (...중략...)
내 소년 시절을 통해 메제글리즈가 이미 더 이상 콩브레 토양과는 닮지 않은 땅의 기복 탓에 멀리 가면 갈수록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면,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중략...) 
나는 그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 (...중략...)
두 길은 멀리서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여러 다른 오후들을 소통이 안 되는 밀폐된 항아리 안에 가두고 있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237~238

 

마르셀의 머릿 속에서 분리되어있던 두 길이 사실은 하나로 이어져있는 것으로 밝혀지는데, 마치 잃어버린 기억들이 하나의 통합되어 영원해지는 작가 마르셀의 글 쓰기 활동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평소 스완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가족들이 스완의 부인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스완네 집 앞(탕송빌)을 우회해서 산책을 했다면, 마침 그날 스완이 집에 없다는 소식에 가족들은 탕송빌이 있는 스완네 집 앞 산책로를 지난다. 마르셀은 수 페이지(p.241~248)에 걸쳐 분홍색 산사 꽃을 찬미하다가 갑자기 마주하게 된 드라마틱한 장면을 묘사한다.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떤 모습이 단지 우리 시선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지각을 요하면서 우리 존재 전부를 사로잡은 것이다. 붉은빛 도는 금발머리 소녀가 지금 막 산책에서 돌아온 길인 듯, 손에 정원용 삽을 들고 분홍색 주근깨투성이 얼굴을 들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248


질베르트다. 향기 가득한 분홍색 산사 꽃은 질베르트의 붉은빛 금발과 분홍색 주근깨로 이어지며 마침내 모든 색을 삼켜버리는 강렬한, 새까만 눈동자에 이른다. 비웃는 듯한 표정과 '건방진 의사 표시'의 손짓에 당황한 마르셀에게 그녀를 부르는 스완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 처음으로 질베르트의 이름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질베르트의 이름이 내 곁을 지나갔다. 그 이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불확실한 이미지에 불과했던 것에 사람의 모습을 부여하여 어느 날인가 그 사람을 되찾게 해 줄 부적처럼 주어졌다. ...(중략)...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그녀 미지의 삶을 펼치고 있었다. ...(중략)... 질베르트가 어머니의 위압적인 어조에 하나디 대꾸도 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난 그녀가 누군가에게 복종해야 하고, 따라서 다른 모든 것보다 그렇게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이 내 고통을 진정시켰고 희망도 얼마간 줬으며 내 사랑도 조금 누그러뜨려 주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250

 

게르망트, 질베르트...... 기억 안에서 이름은 그 존재의 명확히 드러내고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존재 자체와 이어진다. 마치 작품 초반에 꿈에서 깬 마르셀이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기억의 조각들을 연결하는 것처럼, 실존-기억의 관계에서 이름은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

마치 첫눈에 반한 것처럼 질베르트를 알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마르셀은 마치 먹음직한 포도가 손에 닿지 않자 그 포도는 너무 셔서 못 먹을 거라고 단정해버리는 여우 이야기처럼 질베르트의 단점을 찾아낸다. 이러한 사랑(소유 혹은 집착)의 속성은 이어지는 스완의 사랑에서 더 길고 자세히 펼쳐진다.

 

내 모욕받은 마음이 질베르트와 같은 수준이 되든가 아니면 그 사랑을 내 모욕받은 마음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리든가 해야 했다. 난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를 모욕하거나 아프게 하여 그녀로 하여금 나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그런 시간을 갖거나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던지, 오던 길을 되돌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넌 정말 추하고 이상하게 생겼구나. 역겨워."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251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플라토닉 사랑이라면 오히려 가질 수 있음에도 갖지 않고 더 높여 숭배하겠지만, 그와는 반대로 마르셀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본능적이다. 갖지 못한 것을 망가뜨려서라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갖고 말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은 사랑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곧 파리로 떠나게 된 마르셀은 (질베르트와 사귀지 못하고 떠나는 아쉬움에서였을까?) 산사나무 앞에서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모자를 짓밟으며, 자신이 크면 봄이 올 때마다 파리에 가는 대신 시골로 내려와 산사 꽃을 보러 오겠다고 울부짖으며 다짐한다. 뒤이어 레오니 고모가 죽었을 때, 마르셀은 슬퍼하는 감정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데, 그 모습은 죽은 피아니스트 뱅퇴유 씨의 사진에 침을 뱉으며 동성연애를 즐기는 그의 딸의 모습을 훔쳐 보며 사디즘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뱅퇴유 양의 일상에서 겉으로 드러난 악의 모습은 너무도 완벽해서, 그 정도로 완벽하게 실현된 악의 모습을 사디스트 여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란 힘들 것이다. 오로지 딸만을 위해 살아 온 아버지 사진에 친구가 침을 뱉는 것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시골 별장의 진짜 등불 아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도시 불바르 극장의 조명 아래서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멜로드라마의 미학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사디즘밖에 없다. 
...(중략)... 그녀 같은 사디스트는 악의 예술가이지, 완전무결하게 악한 사람과는 다르다. ...(중략)... 뱅퇴유 양 같은 사디스트들은 아주 감상적이고 천성적으로 고결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관능적인 쾌락마저도 뭔가 사악한, 악인의 특권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들이 잠시 관능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도 사실은 잠시나마 그들의 소심하고도 다정한 영혼으로부터 탈출했다는 환상에 빠지려고, 악인의 껍질을 쓰고 공범자와 함께 쾌락의 비인간적인 세계로 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284~285

 

철학에 있어서 선악의 문제는 자주 다뤄지는 테마다. 진정한 악은 불가하다거나, 악은 선의 반대가 아니라 선의 결핍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마르셀은 죽은 아버지의 사진에 침을 뱉으면서 쾌락을 즐기는 뱅퇴유 양을 옹호하는 듯, 사디즘을 악한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저변에 깔린 태생적 선함의 반작용으로서 일시적 일탈로 묘사하는 듯 하다. 아마도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옹호하기 위한 방어기재였을까?

 

재미난 것은 죽어서도 불쌍하고 비참한 뱅퇴유, 그의 소나타 악절이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에서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점이며, 작품의 모든 사랑과 욕망, 집착과 모욕 등이 유기적으로 엮인 듯 하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