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ep.3 - 스노비즘
마들렌과 홍차의 추억 속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레오니 아주머니는 남편이 죽은 뒤 마음을 닫고 점차 자기 방에 침대에만 누워있는 특이한 사람인데, 은둔형 외톨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죽을 병에 걸렸다고 단정하고 곧 죽을 듯 침대에만 누워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슬픔과 무기력, 병과 고정관념 그리고 신앙심이 뒤섞인 모호한 상태로 자리에 누운 채, ...(중략)... 아주머니는 항상 낮은 소리로 말했는데, 머릿속에 뭔가 깨어져 떠돌아다니는 것이 있어 너무 큰 소리로 말을 하면 그것이 움직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자주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듣곤 했다. "내가 잠을 자지 않았다는 걸 꼭 기억해야 해." ...(중략)...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94, 96
평범하지 않은 레오니 아주머니를 묘사하느라 나열된 단어들이 날카롭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그에 따른 무기력만 보자면 우울증 환자를 떠올리겠지만, 그러기에 레오니 아주머니는 밝고 때로 수다스럽기까지 하며, 세상 일에 관심이 가득하다.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쉽게 피곤해지고 기운이 빠지고 오직 침대 옆 창문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그 세상을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해석해댄다. 게다가 투철한 신앙심마저 말 그대로 뒤섞여 진짜 아픈 사람인지 아닌지 모호한, 정신적으로 특이한 사람처럼 보인다. 뒤이어 나오는 레오니 아주머니의 일화들을 읽다 보면 비로소 이 단어들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몇 개 단어로 사람을 현실감 있게 묘사할 수도 있구나, 감탄스럽다.
최근에 MBTI 심리 검사가 유행하면서 사람의 성격을 네 자리 알파벳으로 쉽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소설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이나 타인을 묘사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 같다. 20세기 말 인터넷의 등장으로, 한 인간이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6명만 건너면 세상 모두를 알 수 있게 된 것도 모자라, 메타버스 가상세계에서는 인간과 구분하기 어려운 튜링의 디지털 휴먼들까지 등장해 우리의 인간관계는 빠르게 늘어나는 동시에 (비인간적 경향으로) 소모되곤 한다. 누군가를 묘사하기 위해 공들여 신중하게 채택된 단어들 대신, 몇 개 카테고리로 쉽게 인간을 특징지어주는 MBTI는 스피드가 생명인 현대 비즈니스에 특화된, 인간을 도구화하려는 효율화의 관점에서 신속하게 상대를 파악하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비인간적인 척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좀 더 여유를 갖고 상대를 충분히 들여다 보고 대화하며 조심스럽게 써내려간 이름표만이 우리의 우정과 사랑을 보장해줄 것이다.
작품 초반 굿나잇 키스 에피소드에서 이미 등장한 프랑수아즈는 원래 레오니 아주머니의 시중을 들었으나 레오니 아주머니가 죽은 뒤에 마르셀 집에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우리에게 적어도 처음 몇 해 동안은, 아주머니를 대하는 것과 같은 존경심, 어쩌면 그 이상의 애정을 베풀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같은 '가족'에 속한단는 특권에다(프랑수아즈는 같은 혈통이 가족 구성원들을 맺어 주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대해 그리스 비극 작가만큼이나 경의를 표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101
그녀는 집주인의 신분과 명예가 높을수록, 자신의 사회적 위치 또한 우월해진다고 믿는 사람인데, 우리네 사극에서 유명하고 부유한 집 노비들이 그보다 덜한 노비들을 업신여기는 듯한 모습이 비춰지는 것을 보면, 흔히 노비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무자비한 착취나 비극적인 주종관계와는 달리, 실제로는 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더 나아가, 현대의 주종관계와 마찬가지로, 가령 직장인이 좋은 회사를 다닐수록 그 회사가 자기 것이 아님에도 자부심을 갖는 것처럼, 연대감 내지는 소속감 같은 것이 깔려 있던 게 아니었을까?
프랑수아즈는 작품 전반에 걸쳐 끝없이 등장하면서도 특별히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보여주진 않는데, 마치 어떤 화가의 그림에서 계속 등장하는 배경처럼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마치 책을 펴면 항상 마르셀 주변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고 작품에서 툭 튀어나와 마르셀의 여자친구를 싫어할 때는 마치 내 자신이 작품 안에서 마르셀에게 충고하는 것 같은 현실감을 자아낸다. 이번 독서를 통해 (지금껏 간과했던) 프랑수아즈의 언행을 들여다 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듯 하다.
미사를 보고 오는 길에 종종 만나는 르그랑댕은 해박한 엔지니어이자 달변가다.
그는 엔지니어라는 직업 탓에 ...(중략)... 눈부시게 성공을 거둔 과학자라는 경력의 사람들 중에는 그들의 직업적인 전문지식에는 소용없지만 대화를 주고받을 때는 도움이 되는 그런 전혀 다른 종류의 문학적, 예술적 소양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데,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문학가보다 더 문학적이고 화가들보다 더 '능숙한 솜씨'를 보여 현재 자신의 삶이 스스로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 나머지, 실제적인 일에는 충동적인 기분이 섞인 무심함과, 또는 고상하면서도 도도하고 멸시하는 듯하면서도 씁쓸하고 성실한 열성을 보인다. ...(중략)... 우리가 일찍이 들어 본 적 없는 달변가로서, 언제나 그를 본보기로 삼는 우리 가족들 눈에는 인생을 가장 고상하고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엘리트의 전형이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124
르그랑댕에게 특별히 정이 가는 이유는, 나도 그와 같은 엔지니어인 데다가 대화를 좋아하고 (재능은 없지만 취미에 그치지 않을 만큼 진지한) 문학적, 음악적 소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노비즘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 겉으로는 아닌척 하면서도 뼛속부터 깊이 새겨진 속물근성 또한 르그랑댕과 쏙 빼닮았다. 아는 게 별로 없던 젊은 시절에는 쓸 데 없는 농담들로 허허실실 다녔다면, 그래도 나이가 좀 들고 이것저것 주워들은 뒤에는 그렇게 듣고 본 것들을 대화 중에 인용하며 아는 척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근성이 심해졌다. 가령 철학에 자주 등장하는 역설(paradox)이나 SF에 빗댈만한 터무니 없는 주장(e.g.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들 몇 개만 알고 있어도 어려운 설명 없이 쉽게 던지며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다. 또한 이야기할 때 태도도 중요한데, 남을 웃기려는 말을 할 때 먼저 웃으면 안되는 것처럼, 르그랑댕은 시적인 말투로 자신을 더 끌어올리고 싶어하는 듯 하다. 다음은 르그랑댕이 마르셀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부분이다.
"와서 나이 든 친구와 함께 있어 주게나."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나라로부터 나그네가 보내 주는 꽃다발처럼, 아주 오래전에 내가 지나온 봄날 꽃향기를 그대 젊음에서 맡게 해 주게나. 앵초, 민들레, 금잔화와 함께 오게나. 발자크의 식물군에 나오는, 순수한 사람의 꽃다발을 만든 꿩의비름과 함께 와 주게나. 부활절 아침의 꽃 데이지와 함께 오게나. ...<중략>..."
나는 르그랑댕 씨와 함께 그의 집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밝은 달이 비추었다. "고요함에는 좋은 점이 있다네, 그렇지 않은가?" 라고 그는 말했다. "나처럼 상처 받은 마음에는, 그대가 나중에 읽을 소설가가 말했듯이, 그늘과 고요만이 적합하다네. 그리고 여보게, 자네에게는 아직 먼 일이지만, 일생을 통해 우리 지친 눈이 오늘같은 아름다운 밤이 어둠과 더불어 준비하고 증류하는 달빛만을 감내하고, 또 우리 귀가 침묵의 플루트 위에서 달빛이 연주하는 음악 외에 다른 것은 듣지 못하는 시간이 올걸세."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223~225
이때 마르셀은 르그랑댕에게 게르망트 성주 부인들을 아는지 물으며 르그랑댕의 스노비즘을 건드린다.
...(중략)... 스노비즘에 반대하며 늘어놓는 그 열띤 장광설에 놀랐는데, 그는 스노비즘에 대해 "틀림없이 사도 바울이 용서받지 못할 죄악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 죄악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중략)... 르그랑댕 씨의 여동생이 발베크 근처 바스노라망디 지방의 한 귀족과 결혼했는데도 귀족들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중략)...
그러나 최근에 처음으로 목격한 부인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나는, 르그랑댕이 이 근방 여러 귀족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혹시 그 부인도 알지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저어, 선생님, 아십니까? 게르망트 성주 부인을? 아니, 게르망트 성주 부인들을?"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것을 내 꿈속에서 끄집어내어 객관적인 존재와 음향을 부여함으로써 그 이름에 대해 일종의 권한을 가지게 된 것 같아 행복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125, 126, 225
아직 작품에서는 마르셀이 게르망트 공작 부인을 처음 보게 된 일이 나오지 않았는데, 복선처럼 부인을 목격한 것을 언급하는데, 이 또한 마르셀의 스노비즘처럼 느껴지는 것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스노비즘은 부정적이라기 보다는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처럼 그려진다. 아니, 사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스노비즘에 구속받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오늘날 우리도 여전히 유명한 재력가나 명예를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때로는 그들을 인정머리 없고 돈에 환장한 부류처럼 비난하기도 하고 그런 삶을 부러워하는 것은 마치 삶을 제대로 살 줄 모르는 것처럼 얘기하곤 하는데, 속물근성은 자신이 못 가진 것을 가진 상대를 부러워하는 인간의 본성으로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다. 명품에 빠진 사람들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 또한 비싼 옷을 입고 나간 모임에 남들이 알아주기라도 하면 뿌듯해 지는 속물근성은 과연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일까?
작품에서는 스노비즘을 나쁘다고 혹은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실을 묘사할 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간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시간들, 그 추억 안에 스노비즘 또한 단지 사람들이 보여준 사건들일 뿐이다. 프루스트가 스노비즘을 우스꽝스럽게 비꼬려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프루스트의 의도가 아니라 독자의 의도일 것이다. (스노비즘은 스노비즘에 빠진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적해 열등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 중에 하나다.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노비즘이든 뭐든, 지나간 추억은 아름답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몇백년 전 일들을 읽으면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잘 와닿지 않지만, 지인 중에 고인이 된 사람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조선왕조실록과 지인의 사진 사이에서 신비롭고 숙연한 기분이 들곤 하는데, 1인칭 시점의 사실적이고 자세한 묘사와 시대를 바라보는 감정과 시선에 온전히 빙의되기 때문이다. 십 수년 전, 스페인 꼬르도바에 사는 친구의 별장에서 늦게까지 저녁 식사를 했던 일이 있었는데, 외진 시골이라 주변에 집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내리자 주변은 드넓은 평야의 고요로 뒤덮였고 멀리 어둑한 산들은 그림같은 장막을 펼치며 그 아래 수많은 별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는데,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바라보던 순간, 차가운 밤공기에 수 천년을 흐르던 바람 속에서 무수한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추억이 아니라, 수 천년 전 그 자리를 걸었던 누군가의 추억, 누군가의 시선이었으며, 그때도 지금처럼 같은 별들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시간을 잃고 시작도 끝도 없는 공간들 속에서 황홀경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모든 별은 그저 아름답고 무의미하며, 사람 또한 별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아무 일 없이 지나간 모든 순간들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사실에 공감하면서도, 모든 사람의 삶이 아름답고 가치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한편으로는 그 반대편에 있는, 고통과 비극으로 얼룩진 인생들까지도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지 주저하는 마음이 든다.
마르셀은 작은 할아버지인 아돌프 할아버지 집에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화류계 여인 오데트를 처음 만나게 된다. (작품에서 이 만남에는 연대기적 착오가 있다고도 한다.) 연극에 빠져 있던 마르셀은 아돌프 할아버지가 여배우들을 많이 알고 지내는 것을 알고 소개를 받고 싶은 마음에, 여자들이 할아버지 집을 방문하는 날에 기습적으로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간다. 평소 아돌프 할아버지 집에는 여배우들뿐만 아니라 화류계 여자들도 드나들었는데, 마침 그날 아돌프 할아버지 집에는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오데트가 방문해 있었다. 마르셀이 아돌프 할아버지 집에서 화류계 여인과 만나게 된 사실을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자랑스럽게 털어놓으면서 결국 마르셀의 가족과 아돌프 할아버지는 연을 끊게 되는데, 마치 양반들이 하인들과 겸상조차 안했던 것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소개 받거나 말을 나누는 것조차 부끄럽고 부도덕하게 여기는 스노비즘의 단면이다.
이러한 단면은 비단 브르주아 계급과 화류계 여인의 괴리 만큼이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사이 외에도, (발베크에 아는 사람이 사느냐는 마르셀 아버지의 집요한 추궁에도) 발베크에 사는 르그랑댕의 여동생을 마르셀의 가족에게 소개시켜주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 줄행랑을 치는 르그랑댕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르그랑댕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동시에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렇게까지는 살집이 좋으리라 추측하지 못했던 르그랑댕의 엉덩이가 일종의 혈기왕성한 근육질 파도처럼 역류했다. 어떤 정신적인 표현도 찾아볼 수 없는, 다만 비속함으로 가득한 호의가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고 있는 그 순수한 물질의 파동이, 그 관능적인 물결이 내 머릿속에 갑자기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르그랑댕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221)
작가 베르고트를 처음 알게 해 준 친구 블로크 또한 스노비즘에 허세로 가득한 인물인데, 마르셀의 집안 배경을 갈망해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면서도 뒤에서는 마르셀의 고모 할머니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했다가 결국 마르셀의 가족에게 내쫓기는 신세가 된다. 또한 이 작품의 2권의 주인공인 스완도 종종 등장하는데, 스완의 높은 사회적 위치에도 마르셀의 가족은 스완을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물론 당시 많은 클럽 인사들이 알고 있는 스완이라는 인물과 고모할머니가 상상하는 스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중략)...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중략)... 이처럼 스완에 대한 부모님의 이미지에는, 그의 사교 생활에 대한 무지로 인해 숱한 특징들이 빠져 있었는데, ...(중략)... 우리 친구를 감싼 이 육체라는 봉투는 그의 부모님에 관한 추억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그런 스완만이 내게는 완전하고 살아 있는 존재였다. 그리하여 훗날 내가 비로소 정확히 알게 된 스완으로부터 이 최초의 스완에게로 기억을 더듬어 옮겨 갈 때에는 어쩐지 한 사람과 헤어져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42~44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허를 찌르는 말이다. 철학자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나라는 존재가 타인의 관점에서 규정되는 모습을 묘사한다. 사르트르는 좀 더 비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프루스트의 뉘앙스는 객관적인 현상을 지적할 때처럼 평온하다. 스완을 철없는 사람처럼 과소평가하던 마르셀의 가족들 중에서도 특히 고모 할머니는, 빌파리지 후작 부인이 스완과 친하다고 말을 듣고 스완을 높이 보기는커녕, 빌파리지 후작 부인에 대한 평가를 낮춘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되면 그 생각을 다시 바꾸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긍정적인 선입견이 아닌 경우, 즉 부정적인 '편견'을 갖게 된 경우, 그에게 더욱 가혹해진다. 조금만 잘못해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뒷담화는 매우 조심해야 하는 일인데, 사실을 말하는 경우에도 듣는 사람에게는 편견에 편견을 더할 수 있어 파급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나 또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주구장창 들었던 말이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잘하지만, 싫어하는 일은 안하려고 든다.'라는 말이었다. 사실 세상에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싫어하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기 싫은 업무가 있을 때 일을 안하거나 덜한 것이 아닌데도, 정작 미션을 다 수행해내고 좋은 결과를 낸 경우에도, 여전히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재미난 것은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조직으로 옮기고 나자 그런 소문은 사라졌는데, 이번에는 '코딩을 엄청 빨리, 잘 하는데 버그가 많다.'라는 말이었다. 나의 코딩이 문제가 된 경우도 거의 없었고 어쩌다 버그가 나오면 누구보다 빠르게 해결하곤 했는데, 프로그래밍을 생업으로 하는 프로페셔널로서 억울하고 자존심 상하는 가스라이팅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버그가 많다고 치자. 세상에 버그 없는 프로그래머가 어디 있으며, 남들보다 더 빠르게 코딩을 하는 것이 장점이라면 스피드와 안정성은 트레이드 오프 관계이므로 빨리 잘하는데 안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말 그대로 트레이드 오프 관계를 나타내는 말일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최초로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했을 것이고 그 말이 돌고 돌아 나는 또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또 새로운 조직으로 옮긴다면, 또 누군가의 편견에 새로운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 맞다. 더구나 그들의 혀가 누군가를 가스라이팅하고 괴롭히는 지옥불과도 같다는 사실을 정작 그들은 모른다는 점에서 타인은 정말이지 뜨거운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