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북톡

[리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ep.2 - 마르셀의 부모

루벤초이 2022. 12. 17. 06:39

어머니의 굿나잇 키스를 받으려고 복도에 서 있다가 아버지에게 들키자, 어머니는 마르셀에게 도망가라고 한다. 마르셀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엄마가 마르셀에게 도망치라고 했을까? 

 

아버지는 '원칙' 같은 것에 구애받는 분이 아니셨고, '사람들의 권리'에도 신경을 쓰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정한 폭넓은 규약 안에서 내게 허락되었던 사항들을 종종 거절하곤 하셨다. 지극히 우발적인 이유나, 또 어떤 때는 아무 이유도 없이, 내가 약속한 것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도저히 금지할 수 없는 그렇게도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산책을, 내가 막 나가려는 순간 금지하거나, 조금 전 아래층에서처럼 정해진 시간보다 훨씬 전에 "그만 올라가서 자거라. 잔말 말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또한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할머니가 말씀하시는 의미에서) 엄밀히 말하면 비타협적인 분도 아니셨다. 아버지는 한순간 놀라 화난 표정을 지었지만, 어머니가 당황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자 ...(중략)...
"애 버릇을 이렇게 들일 수는 없어요."하고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녀석이 울적한 모양이오, 가슴 아픈 일이 있는 모양이지. 우리가 처벌만 하는 사람은 아니잖소. ...(중략)... 난 당신들만큼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못 되니 가서 잠이나 자야겠소."
나는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가 신경과민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아버지를 언짢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71~72

 

마르셀의 아버지는 아들의 신경과민을 걱정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일관성 없는 행동이 주는 영향에는 다소 무심해 보인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심리학 특히 아동 심리에 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없었을 테니 아이의 문제가 부모나 가정 환경에서 비롯되는 부분을 간과했을 테지만, 프루스트는 예민한 통찰력으로 마르셀(자신)의 신경과민이 아버지의 변덕과도 엮여있음을 짚어낸 듯 하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 지 예측하며, 예상치 못한 반응을 접하면 당황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데, 화를 내거나 네거티브한 반응이라면 스트레스는 더욱 커진다. 하물며 상대가 가족이나 친구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고 소중한 존재라면 스트레스는 훨씬 더 클 텐데, 설상가상으로 마르셀처럼 예민한 사람에게는 병적인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동심리학이나 아동 케어 프로그램에서 항상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일관성 있는 훈육 태도인데, 잘 알면서도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것이란 사실은 부모라면 두말 없이 동의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어느날 차 안에서 한참 울던 서너살배기 우리 아이들을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지르며 혼낸 적이 있는데, 차 안이라서 고함이 더 크게 들렸는지, 그 즉시 아이들은 깜짝 놀라 울음을 멈췄고 백미러에 비친 아이의 두려워하던 표정이 다시 내게 충격과 스트레스로 다가와 고함을 멈추지 못한 적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느닷없이 변해버린 아빠에게 어떤 마음을 느낄지 두려웠고 그 두려움 자체가 다시 분노로 변해 그것이 모두 아이들의 탓인 마냥 더 화를 내게 만들었다. 순간 나는 아주 먼 옛날 기억이 떠올랐는데, 할아버지가 집에 놀러오시면서 아이스크림을 사오셨는데 할아버지 먼저 한 입 드리라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실컷 먹다가 할아버지가 가신 뒤에 평소처럼 재롱 부리듯 아버지 무릎에 앉았을 때, 정색하시며 회초리를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말을 한순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있다가 문득 아버지 표정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는 아차 싶은 생각에도, 이대로 무릎에 앉아있어야 하나 일어나야 하나 어찌할 줄 모른 채, 불안과 당혹감 속에 깊은 충격에 빠졌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내거나 윽박지를 때, 나는 그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고 또 그런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은 멈추고 눈을 마주치지도 안 마주치지도 못한 채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 속에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뭔가 잘못했겠지 싶어 잘못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가스라이팅에 아주 적합한 성격일 수 있겠으며, 나에게서 미안하다, 죄송하단 말을 들었다면 그는 (혹은 당신은) 나를 가스라이팅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마르셀의 일화에서, 격동의 20세기를 살아간 가부장적이고 무심한 표정의 전형적인 우리네 아버지와 그 억압된 시절 속에서 남편 비위를 맞추며 가정의 평안을 유지하던 우리네 어머니 모습이 그려지는 것을 보면, 친구 같은 아버지 어머니, 아니 아빠 엄마가 나타난 것은 그리 오랜 역사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손주들에게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표정과 행동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있으려면, 애초에 마음이야 매한가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나마, 나와 아이들은, 아버지와 나보다는 더 많이 가깝게 지내는 그런 시절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어머니가 마르셀의 방에서 함께 자는 것은 마르셀에게 또 다른 슬픔으로 다가오는데, 자신의 승리가 곧 어머니의 포기란 사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마르셀을 나무라지 않고 그냥 보듬어만 주는데, 마르셀이 왜 우냐는 프랑수아즈의 질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내 슬픔은 더 이상 벌을 받아야 하는 죄가 아니라, 내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병으로 공인되었고, 내 책임이 아닌 신경 증상으로 간주되었다. ...(중략)... 나는 행복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어머니로서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양보를 하셨으며, 나를 위해 품어 왔던 이상을 어머니 쪽에서 처음으로 포기하셨으며, ...(중략)... 나는 이제 막, 눈에 보이지 않는 불경한 손길로 어머니 영혼에 첫 번째 주름살을 그었고, 첫 번째 흰 머리칼을 나타나게 한 것같이 느껴졌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75~76

 

흐느끼는 마르셀을 가만히 안고 있던 어머니는 본인마저 슬퍼질까봐 책을 읽어주기로 한다. 마르셀은 안정을 되찾고 감미로운 기분으로 다시금 행복해진다. 나에게도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추운 겨울날 어머니와 누나, 셋이서 베게를 품에 안고 나란히 안방에 누운 채로 방학 숙제였는지 그냥 책이었는지 뭔가를 보면서 허리춤까지 이불을 덮은 채 따뜻한 아랫목에서 귤을 까먹던 적이 있었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너무나도 평온하고 안정감 있는, 무한한 행복을 느꼈던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마치 궂은 날씨에 가족 모두가 안전히 귀가한 어느 날, 소파에 앉아 창문을 때리는 비바람을 바라보며 우리는 모두 안전하고 집에 통째로 날아가더라도 우리는 함께 있으니 견딜만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그런 면에서, 안정감은 상대적인 것인가 보다.

 

이제 마르셀은 추억을 접는다. 그 추억은 아름답고 아련하지만, 단편적이고 정적이며 잠들어있고 어둡다. 마치 한 조각의 벽면처럼.

 

이처럼 오랫동안 한밤중에 깨어나 콩브레를 회상할 때면, ...(중략)... 콩브레는 언제나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잘린 빛나는 한 조각 벽면으로만 떠올랐다. ...(중략)... 한 마디로 그것은 언제나 같은 시간에, 주위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어 내 옷 벗거의 비극에 필요한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더불어 홀로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콩브레에는 좁은 계단으로 연결된 두 층만이, 단지 저녁 7시만이 존재한다는 것처럼. ...(중략)...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지적인 기억, 지성의 기억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이런 기억이 과거에 대해 주는 지식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으르모 나는 콩브레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마음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84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85

 

이것이 작품의 주제인 비의지적 기억의 반대, 의지적 기억의 예다. 의지적 기억, 즉 일부러 떠올린 기억은 단편적이고 죽은 기억이다. 반면에 비의지적 기억은 노력이 아닌 나도 모르게 우연처럼 떠오르는 기억인데, 저 유명한 마들렌 일화를 통해 비의지적 기억이 떠오르는 과정을 묘사한다. 문학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구절이므로 주의 깊게 읽어보자.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그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86

나는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아무런 논리적인 증거도 대지 못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앞에서 사라지는 그런 명백한 행복감과 현실감을 가져다주는 이 상태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것을 다시 나타나게 하고 싶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87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89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맏자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뿐이었다.) ...(중략)...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2012) p.90

 

주의할 점은, 마들렌과 홍차를 마시자마자 갑자기 추억이 막 떠올라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단지 오묘한 기분을 느꼈을 뿐이고 그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 (의지적으로) 노력하지만 기억은 점점 더 멀어져간다. 의지적인 시도로는 비의지적 기억을 꺼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때, 레오니 아주머니네에서 먹던 그 맛과 향이 떠오르고 마침내 비의지적 기억은 말 그대로 찻잔 속에서 뿜어져 나온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