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마의 산, 진격의 거인 & 코헬
***** 이 글에는 줄거리 및 결말 등 강력한 스포가 포함돼 있습니다. *****
마의 산 줄거리 (더보기 클릭)
폐결핵에 걸려 요양 중인 사촌 요하임 침센을 3주간 방문한 한스 카스트로프는 시간이 멈춘 듯한 요양원 분위기에 압도되고 이런 저런 환자들 중 쇼사 부인에 대한 연정을 품을 즈음, 폐결핵 징후가 나타나 결국 한스는 7년 간의 요양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 한스를 정신적/철학적으로 교육해주는 세템브리니가 등장하는데, 세템브리니는 진보주의적 일원론자인데 교육적인 측면에서 한스에게 해롭다고 여긴 쇼사 부인과는 대립각을 세운다. (평론에 따르면, 쇼사 부인은 세템브리니와는 아이러니 관계 즉 육체적 - 질병이나 죽음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쇼사 부인을 사랑하면서도 고백하지 못하던 한스는, 몇 개월 뒤 그녀가 요양원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결국 헤어지기 전날, 사육제 모임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뢴트겐 사진을 정표로 받는다. 이때, 요하임 또한 어떤 여자 환자를 좋아하면서도 고백은 커녕 그 마음을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는데, 군인 정신으로 줄곧 명예를 지켜나가는 요하임에게 한스와 쇼사 부인의 관계는 좋게 보이지 않는다.
쇼사 부인이 떠난 뒤, 새로운 교육자 나프타가 등장하는데, 그는 허무주의와 사회주의적 이원론자라는 점에서 세템브리니와 또 다른 대립각을 세우며 만날 때마다 한스 앞에서 논쟁을 벌인다.
그러던 중 요하임은 계속 연장되는 요양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자신의 군복무를 위해 의사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하산하는데, 의사들은 한스에게도 (조금은 홧김에) 같이 하산하라고 하지만, 한스는 오히려 자원해서 요양원에 남는다.
요하임이 떠난 후 적적해진 한스는 스키를 배우는데 어느 날 길을 잃고 눈보라에 갇힌 극한 상황에서 꿈을 꾸며 <인간은 죽음에 대한 관념과 두려움을 버리고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철학적 각성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각성은 극한 상황에서 벗어나자 아무 일 없던 듯 잊히고 만다. 군대에 복귀했다가 다시 병이 악화되어 돌아온 요하임은 결국 병이 심해져 죽고 상심한 가운데, 얼마 지나지 않아 쇼사 부인이 호탕한 자본가 페퍼코른의 연인이 되어 돌아온다.
페퍼코른은 디오니소스 신화처럼 술과 성대한 파티를 열고 호탕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한다. 그런 페퍼코른에 빠진 한스에게 세템브리니나 나프타는 한없이 왜소해 보이기만 하는데, 쇼사 부인과 한스와의 관계를 의심하던 페퍼코른은 마침내 한스로부터 그날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겉모습과는 달리 나이 들고 무기력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자살하고 만다.
그렇게 요하임과 쇼사 부인이 떠나고 우울증에 빠져 변해버린 한스는 축음기 음악에 심취하기도 하는데, 때마침 심령술의 영매인 환자가 요양원에 들어오면서 강령술이 행해지고 심지어 요하임을 불러내기에 이른다. 한스는 강령술로 현실에 나타난 요하임에게 미안하다고 울부짖으며 다시는 그런 모임을 못하도록 꺵판을 놓는데, 이후 요양원의 분위기는 서로 헐뜯고 싸우며 급격히 나빠진다. 그 즈음,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는 거센 논쟁 속에 급기야 결투를 하게 되고 세템브리니는 허공에 총을 쏘지만, 나프타는 그런 세템브리니를 욕하며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한다.
이후 세템브리니도 한스도 허무하고 우울증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7년의 요양 생활을 세월을 버리는 가운데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1차 세계 대전 발발 소식이 전해진다. 한스는 지체 없이 하산하여 전쟁에 참가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전쟁터 한 가운데 진흙탕을 헤매며 <보리수> 노래를 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저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르겠지?>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결말과 진격의 거인 결말은 참 닮아있다.
물론 이 두 작품 뿐만 아니라, 유사한 결말과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은 훨씬 더 많을 텐데, 다만 근래에 읽고 본 작품들이 마침 두 작품이었을 뿐이다. 결국 이러한 결말을 관통하는 것은 <허무주의>이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구약성경 코헬렛 1장 2절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연속이고 인간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데, 그러한 인간의 삶이란 평온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죽어가는데 마냥 행복해 할 수 없는 것은 광기만큼이나 연민 또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살육과 죽음 앞에선 어떤 정의도 철학도 없다. 아무리 진격해도 평화는 찰나이며 분쟁은 끝없이 타오르는 것을, <진격의 거인>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에서마저 반복되고 있다.
허무에 빠져 파괴의 행진을 이어가던 지크는 아르민과의 대화에서 삶이란 캐치볼처럼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으로도 가치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진격을 멈추지만, 과연 작가는 그 사실에 동조했을까? 단지 드라마틱한 구성과 모두의 바람에 동조하고픈 거짓된 희망은 아니었을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처럼, 병상에서 죽어가는 죄없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 본 사람이, 온전한 신앙을 간직할 수 있을까?
장대한 결말 끝에 결국 죽음으로 불타오르는 도시를 보여주는 <진격의 거인>이나, 역시
장대한 결말 끝에 결국 죽음으로 불타오르는 도시로 뛰어드는 <마의 산>이나,
허무로다, 허무! 그 모든 길고 장황한 기억과 이야기들은 그저 잊힐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